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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2

2012/05/04 19:26 from 징후

 

 

 

 


  진우의 어린시절은 참담했다. 주위의 모든 것은 그의 마음속 바램들과는 정 반대로 너무도 넉넉치 못했다. 언제나 모든 것이 너무나 부족하게도 흡족치 못했고, 그런 그의 어두운 생활들은 그의 내면속 자아가 믿고 간직하던 완전함에 다가가려는 절대적인 지성의 꿈트림, 곧 무의식적으로 쫓던 진실한 이상들에 아무런 만족감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풍족했던 것은 오직 주위에 한없이 널린 자연 뿐이였다. 아침이면 울려오는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뀜, 자욱한 아침안개가 아스라하게 덮혀있는 농지와 물방울 아지렁이가 뿌옇게 뜨고 있는 건너편에 자리한 무표정한 숲풀들, 그리고 여지없이 고개를 들어오는 햇살의 존재가 그의 하루를 시작하게 끔 만들며 규칙적으로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직 계절을 추스리지 못한 납엽송들이 시리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그런 전원만이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의 생활은 여느 시골 농부들과 전혀 다를바가 없었다. 밀과 보리 농사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난 그는 졸린 두 눈을 비비며 주어진 일당을 채우기 위해 어김없이 밭을 매야만 했다. 대지의 강한 흙향기와 찌는 듯한 습기 속 땀을 훔쳐가며 일하던 그에게 간혹 들려오는 여름 특유의 속삭임들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을 달래려 날풀에 달라붙어 울어대는 벌레들의 흐느낌이 그렇고, 거목으로 성장해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주는 플라타너스 나무 밑둥이로 서늘하게 불어오던 바람 역시, 그리고 잔잔하던 푸른 잎들의 펄렁거리며 나부끼는 바람소리를 말한다. 그렇게 그에게로 경쾌하게 들려오던 자연의 거침없는 소리들은 그의 노동을 빛나게 만들어 주었고 그에게 작은 위로와 평안이 되어 주었다. 그에게 노동이란 자주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삶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의무이자 빼먹을 수 없는 정해진 일과였던 것이다. 집안이 넉넉한 다른 동네 아이들처럼 교회에 나가 지식을 쌓는 일은 그런 그에겐 과분하다 못해 지나친 사치쯤으로 치부 되었던 것이다. 가끔 농사를 짓고 있는 그를 찾아온 또래들은 험상굳은 그의 고모부의 무서운 눈빛에 어느덧 질려 도망을 치고는 했던 것이다. 한번씩 그런 경험을 겪은 아이들은 좀처럼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아이들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보통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의 으름장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기 마련이다. 아직까지 인성이 성립되지 않은 진우에게 그런 또래들의 일시적인 관심과 자극들은 육체적으로 피곤한 일과로 부터 그의 가슴을 짓눌러 오는 무거움까지를 털어 버리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또래들과 어울려 들판을 뛰놀고 싶은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다가도 지독한 인상을 풍기며 자신을 주시하는 고모부의 눈빛을 의식하고는 곧바로 다시 농사일에 묵묵히 집중하게 된다. 가끔 그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한편으로 그는 자신을 돌보아 주고 있는 고모부를 돕는 일이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것이다. 오히려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이상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힘든 노동을 하던 그에게 또 다른 위안거리가 있었다면 그를 누구보다 아껴주던 마을의 가브리엘 신부님이였다. 그는 진우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외로움에 빠져 방황하고 있던 그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가브리엘 신부님은 진우의 순수함을 꾀뚤어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 무엇으로도 흐트릴 수 없는 그가 지닌 깨끗하고 순수한, 아무 것과도 섞일 수 없는 절대적으로 순연(純然)한 그의 결정(結晶)과 순박함이 가브리엘 신부님을 끌어당긴 것이다.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기본 바탕은 누구나 순수하고 깨끗하기 마련이다. 오로지 루시엘처럼 창조주를 배반하고 그와 맞서 극적으로 타락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한다. 그 작은 가능성은 언제나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쩌면 과욕스런 인간이 구분없이 취한 지식의 습득으로 부터 파생된 허물같은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그건 경험으로 익힌 것이 아닌 본능적인 어둠의 욕구였기도 하다. 가끔보면 잘못된 시작을 해버린 허영심이라는 것이 만인에게 존재한다.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기심에 똘똘뭉친 인간들이 선량한 사회에 멋대로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보통 그런 자는 자신만이 영원한 1인자라 믿고 착각 속에 빠져 사는 것이다. 그들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타협이 아닌 편리를 위함이다. 그것은 유황과 불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세상이 여전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신부님은 분명 남들이 진우의 내면에서 발견하지 못한 그 만의 특출함을 찾아낸 듯 싶다. 가브라엘 신부님은 그가 희망과 절망을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실체이건 아니였던 간에 가브리엘 신부님은 그의 타고난 성심을 다듬어주고 일깨워 줄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다고 그가 좌절과 체념속에 빠져 늘 혼동하며 그것들에게 쉽게 기울여져 가는 유형 또한 아니였던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도움과 조언을 해줄 사람을 여럿 만나게 된다. 그가 한 사람의 곁을 평생 지켜줄 둘도 없는 친구일지도 모르고, 바람같이 어느날 훌쩍 그의 곁을 떠나버릴 가벼운 인연일지도 모른다. 가브리엘 신부님은 바로 진우에게 전자같은 사람이다. 가브리엘 신부님의 작은 관심들은 고단한 그의 일상을 무리없이 지속케 만들어 주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시달려 한없이 기운이 빠져 있다가도 신부님의 따뜻한 경려 몇 마디에 꽁꽁 얼어있던 그의 냉혈한 마음은 곧바로 태양아래 들어난 얼음덩어리처럼 어느세 녹아져 내리고 만다. 신부님의 작은 관심은 그의 매말라가는 영혼에 생수와도 같았고, 몇일을 굶은 배고픈 걸인에게 뜻밖인 상황으로 부터 주어진 한 조각의 빵과도 같았다. 진우는 목마른 자신에게 생수처럼 다가온 가브리엘 신부님의 손길에 투정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였던 진우는 신부님을 통해 부모에게도 받지 못한 맹목적인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사랑은 우선 받는 것이다. 사랑을 배우는 최선의 방법은 타인에게 사랑을 받아보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인간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제공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맹목적인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많은 이들이 감격하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띨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갖은 힘이란 오만을 온유롭게 만들고 편견을 배려로 만드는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향한 그 지고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형태는 장작불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뜨겁게 달굴 것이 자명하다. 가브리엘 신부님은 오랜 수도승 생활로 인해 이미 해탈의 경지를 맛보았을지 모른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자신의 그런 결정이 일종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진우가 받던 사랑이 신의 배려에 의한 특별한 은총이였던, 혹 어린 계집의 봄비같이 찾아든 어설픈 사춘기 감정이였건 그는 신부님께 감사했다. 그런 일방적인 사랑의 특혜란 고작 그의 숭고함을 소중히 여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은혜에 감사하고 상대의 충고까지도 달갑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히 사랑을 나눈 상대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주말마다 진우는 기쁜 마음을 안고 가브리엘 신부님의 부름으로 성당을 찾아갔다. 그의 고모부 역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였으므로 진우가 갖는 가브리엘 신부님과의 주말 만남에 어떠한 제동이나 제약을 걸지 않았다. 성당을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늘 가볍고 들떠 있었다. 굽어진 돌길을 돌아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갓길에 일렬로 심겨져 있는 마을입구 어귀를 돌면 아담한 건물 한 채가 그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주말은 평소때와 달리 목동들이 자신의 양들을 방목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도 있었다. 매우 평온해 보이는 푸른 언덕에서 양들은 마음껏 풀을 뜯고 있었다. 건너편 개울에 쭈그리고 앉은 마을 아낙들은 시원한 시냇물에 옷가지들을 행구며 나무방망이를 사용해 두툼한 빨래감을 두둘겨 빨기도 했다. 나무사이를 잇는 노끈 위에는 하얀 천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가끔 진우는 상류에 모인 아이들이 낚시를 즐기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성당으로 발길을 옮기던 진우는 이 모든 일상들이 모두 계절이 만들어내는 소리라고 믿었다. 성당 뒤뜰을 지나면 붉은 벽돌들로 쌓아올린 작은 가옥이 하나 보이는데 그곳은 가브리엘 신부님이 주중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문학을 배우고 라틴어를 익힌다. 그것은 동네에 가브리엘 신부님 보다 학식이나 연륜이 높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 몇명이 모여 상의 끝에 그에게 청탁을 해온 것이다. 지식은 나누어야 한다는 신념에 가브리엘 신부님은 흔쾌히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짙은 고동색 휘장으로 입구가 가려진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실을 지나면 바로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이 나오는데, 신부님은 탁 트인 공간 중앙에 여러개의 책상과 걸상들을 한데 모아 수업을 진행했다. 한쪽 벽면에는 과제물과 개인 소지용품을 담을 수 있는 서납장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고, 말끔하게 설계된 장식장 옆에는 파스텔 톤의 피아노포르테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신부님은 종종 그에게 간단한 멜로디를 들려주고는 했는데 그는 거기에 담긴 심미적인 소리의 향기를 조금씩 배워가며 피아노포르테가 만들어 내는 순수한 음에서 알수없는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더기처럼 둔하게 자라기 시작한 그의 쾌감, 그리고 그는 공기 속으로 울려오는 음절들을 통해 새로운 소리를 접하기에 이르렇고, 또 그렇게 소리에 대한 아름다움을 조금씩 추구하기 시작했다. 신부님을 만나기 전까지 까막눈이였던 진우는 그가 바쁘지 않은 한적한 주말저녁을 틈타 읽는 법과 쓰는 법, 그리고 독해를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또한 운좋게도 그는 농부로써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공공 예의, 공소예절과 기본예절들을 차츰 가브리엘 신부님에게로 부터 익혀 나갔다. 성당지하에는 작은 도서실이 있었는데 진우는 그곳에서 수많은 문학, 고전, 그리고 명시들을 독파해 나갔다. 가브리엘 신부님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였다. 가브리엘 신부님은 그가 믿는 예수처럼 목수일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는데, 그는 시간이 허락 할 때마다 진우에게 그것들을 조금씩 전수해 주었다. 주중 고단한 농사일로 피로에 쌓여있을 법한 진우는 이상하리 만큼 가브리엘 신부님과 보내는 주말동안 만큼은 전에 없던 생기가 돌고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중요한 것은 그의 타고난 소질이였다. 나름 그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그것을 받쳐주는 섬세함, 새로운 기술에 대한 진취적인 태도, 그리고 끊임없이 발하는 그의 열성으로 인해 흥이난 가브라엘 신부님 역시 진우와의 시간을 탐탁하게 여겼다. 처음 여러번은 내성적이고 외곬은 진우의 성격 때문에 그가 진우에게 기술을 가르치기에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대화없이 모든 것을 행동으로 설명하는 과묵한 가브리엘 신부님은 성심을 다해 꾸준히 많은 가르침을 진우에게 선사해 주었다. 그렇게 둘 사이 1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3년이라는 시간에 가까워졌다. 그의 겉모습은 이미 청년에 가까웠다. 그의 외모가 자람과 동시에 점차 진우의 내적인 측면 역시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틈틈히 문학을 즐겨읽게 되었고, 즉흥적으로 시를 읊으기도 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우의 목재 다루는 솜씨는 하루가 멀다하고 꾸준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피에는 탁월한 목수의 기질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기술을 전수한 신부님까지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그가 작업해 놓은 가구나 기구들은 정교하고 세밀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 진우의 엉뚱하리 만큼 설명할 수 없는 도발적인 표정과 경중이 여지없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는 했는데, 가브리엘 신부님은 겸허한 태도로 그런 그를 이해하고 있다는 눈빛을 지어오곤 했다. 그런 가브리엘 신부님은 그의 의중을 깨닮았다는 표정으로 늘상 그를 보듬어 주었다. 그는 진우가 겪고 있던 반항과 반감에 가득찬 청년기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신부님은 그런 그의 순간적인 격정과 누르기 힘든 충동적인 사고를 억제시키기 위해 다른 것으로 그의 화제를 돌려 주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소리들이 존재하지. 가축들이 가끔 질러오는 외침, 곤충들이 만들어 내는 흐느낌이라거나 존재의 가벼움을 알리는 파도나 무의미한 바람과 같이 자연이 우러내는 심오한 소리, 그리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인간이 목청을 통해 질러대는 소리, 의견, 주장, 참견, 요구, 비명, 신음, 그리고 피아노포르테 같은 인위적으로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이 그런거야. 소리의 성향은 무한하단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온도와도 같은거지. 겨울내 움크리고 있던 나무나 풀들은 부드러운 봄의 기운이 다가오면 슬슬 푸른 잎사귀들을 가지사이로 들어내며 기지개를 펴잖니. 모든 사물들은 온도 뿐만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 앞으로 들어날 감정의 방향을 모색하지. 그리고 ‘보통’이라는 것은 아주 단조로운 음들만을 말하는 거란다. 표준이라는 것은 다만 구분을 위한 일정한 표식일 뿐이고, 각자가 느끼는 소리는 온도처럼 개개인에게 다르게 느껴지지. 우리는 상대방과의 소통을 위해 목청으로 바람을 불어내어 소리라는 것을 끊임없이 제조해 내잖니.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들이 주위에 정말 많지만 잘 들어보게 되면 대부분의 목소리들은 제각기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 자연도 마찬가지야. 모두는 대자연이란 그저 인간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신이 마련해 놓은 도구라고만 여기지. 그래서 자연이 우리에게 말해오는 무수한 이야기들을 대부분 쉽게 무시해 버리곤 하지. 아직까지 설명할 수 없는 소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심금을 울리는, 마음이 예고없이 자아내는 영혼의 소리야. 그 소리를 알려면 자연의 소리와 그들의 호흡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단다.” 어린 진우는 가브리엘 신부님이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우는 어느세 마음속에 일고있던 충동이 슬며시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닮지 못했다. 더없이 강렬하던 그의 눈빛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채 진우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신부님이 설명한 자연의 소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케서린은 이렇게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오늘 오후에 있을 연주회 때문에 얼마간 별다른 잠념없이 생각의 추를 꼭 붙잡아 맨 채 지독하리 만큼 혹독하게 연습만을 지속해 왔던 그녀였다. 어느날은 서광이 찾는 새벽무렵까지 밤을 세며 연습에 몰두하기도 했다. 같은 곡을 수없이 반복하던 그녀의 얼굴엔 만족스러움이 없었다. 다만 애가 타서 초조한 기색만이 역력할 따름이었다.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그녀는 바이올린을 안고 그대로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은채 몇시간 동안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동이트기전 시끄럽게 홰를 치며 울어대는 새벽닭 덕에 깨어난 그녀는 그제야 침대로 돌아가 고단한 몸을 편히 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갑자기 자신에게 불어닥친 이상한 기류에 대적해 수렁같이 깊은 잡념의 늪 속에서 빠져 허우적거리며 좀처럼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풍성한 주름과 러플들이 달린 아이보리색의 로브 볼랑(robe volante)이 그녀의 비루한 표정과 어색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소진된 욕구와 완전치 못한 애상(哀想), 사라지는 과거속 단조로운 믿음과 희미하게 차오르는 쓸쓸한 감상이 자화상처럼 그녀의 건조한 표정에 투영되고 있었다. 과거 환상의 문턱에 다시 한 발짝을 들여놓은 그녀는 환염(幻燄)을 찾아 헤메이고 있었다. 몸에 기운이 빠진 마냥 그녀의 허탈한 표정이 얼굴 전체에 파도처럼 쓸려다니고 있었다. 몇주 전 마차안에서 떠올리던 어머니와의 외출 외에도 처음 만나 예상치 못하게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버린 진우 생각이 머리속 저 편에서 떠오르기도 했다. 매사에 매우 엄하고 철저하던 어머니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서 말없이 사라져 버렸는지 그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병환이 생겨 요양을 떠나가 버렸다고 들었지만 그 후론 일련의 소식조차 전해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이 길어 질수록 기다림은 간절한 바램으로 바뀌었고, 그 작은 바램은 늦은 오후 석양과 같이 그녀의 머리속에서 해를 거듭할 수록 희미해져 갔다. 어머니 없이 익숙해져가는 하루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어머니의 존재란 그저 과거 한 편을 회상하게 만드는 생각의 편린에 족했다. 한번은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숀 크리스토퍼 자작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살며시 꺼내 보았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간결했다. '나 또한 너희 어머니 소식이 무척 궁금하지.' 다시 물어봐도 자작의 일정하고 짧은 대답은 이전의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자작이 지어오는 무고하고 선량한 표정 역시 그가 더 이상의 내용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케서린에게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대답 후 숀은 언제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서서는 곧장 화제거리를 바꾸어 버리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혼란스러움에서 결코 진우를 빼놓을 수 없었다. 갑자기 혜성처럼 자신에게 등장한 그를 생각하던 케서린은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창백하게 하얀 그녀의 얼굴빛은 마치 빈사지경에 이른 사람 같아도 보였다. 그녀의 마음속에 혹시 봄이 찾아온 것일까. 춥지도 않고, 그렇다고 덮지도 못한 그 중간 쯤의 날씨가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뒤집고 있었다. 그녀는 정원에 널린 봄꽃처럼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피어나는 것을 깨닮았다. 부는 듯 마는 듯, 살랑살랑 스치 듯 가볍게 흘러가는 봄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인가. 사뿐사뿐 가벼운 날개짓으로 꽃밭을 떠다니는 나비들이 혹시 그녀를 현혹시키는 걸일까. 무엇이 그녀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며 혼미하게 하는 것인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소녀나, 연주회를 열심히 준비하는 그녀가 사리에 어둡다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얼마 후 갖게 될 연주회 생각에 무척이나 긴장이 되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무표정으로 케서린의 옷깃을 손질해 주던 하녀는 그녀가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채 익숙한 솜씨로 분주히 그녀의 외출을 돕고 있었다. 하녀가 케서린 머리 위 고데를 풀자 정수리 부분을 제외한 깔끔한 뽕빠두르(pompadour) 머리 스타일이 거울에 반사되고 있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녀에게서 흘러나고 있다. 장식품들을 치장하던 중 누군가의 인기척이 문가로 부터 들려온다. 방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사무엘이였다. 그는 자신이 쓰고있던 밤색 모자를 벋어 한 손에 들은 후 거울 앞에 서 있는 케서린에게 짧은 목례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케서린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전에 아가씨께서 부탁하셔서 만나본 분으로부터 마침 수신이 왔습니다. 아침에 조리장님 심부름으로 야채상회에를 찾아 갔었는데 그 집 주인이 요전 길 건너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던 저를 알아보고는 이 편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야채상회 주인 말로는 전에 길 건너편에서 저와 만났던 친구가 어제 이 편지를 자신에게 맡기고 바로 떠났다고 설명하더군요. 제가 이곳에 들르면 반드시 전해주라고 신신당부하던 말까지 그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케서린은 몸을 돌려 거울과 등지고는 지체할 겨를 없이 입구쪽에 서서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무엘을 바라본다. 사무엘은 무엇인가를 그녀에게 숨기고 있었던지 불안한 표정을 연이어 케서린 앞에 짓고 있다. 하지만 케서린은 그런 그의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채 서둘러 사무엘에게 대꾸를 한다. “어머 고마워요, 사무엘씨. 생각도 못했는데... ...” 주섬주섬 안주머니로 부터 편지를 꺼내든 그가 무슨 일이여서인지 잠시 주춤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 케서린에게로 다가간 사무엘은 편지봉투를 그녀에게 조심스레 건넨다. 짧지만 곤란한 기색이 그의 얼굴을 섬광처럼 스쳐간다. 사무엘은 마치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과도 같다. 안절부절한 그의 표정에선 왠지 이유를 모를 조바심 마져 읽혀지고 있었다. 좀전까지 어두운 표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케서린이 두 눈을 반짝이며 사무엘이 건네는 편지를 급하게 집어든다. 그녀가 갑작히 움직여 드레스가 끌리기 시작하자 걱정스런 표정의 하녀가 드레스 뒷자락을 들어올리며 그녀를 바짝 따르기 시작한다. 사무엘은 그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앞에 서서 그녀가 봉투를 개봉하기만을 지키 서 있었다. 막 봉투를 뜯으려는 그녀의 눈빛이 무의식적으로 그를 의식하자 사무엘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벼운 목례를 케서린에게 건넨 후 방에서 총총히 사라진다. 그녀의 외출을 돌봐주던 눈치느린 하녀도 케서린에게로 부터 일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그녀가 혼자 남아있도록 여유를 차릴 틈 없이 다급하게 방을 비워 주었다. 서둘러 편지지를 개봉한 그녀가 내용을 확인한 후 실망의 표정을 지으며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 앉고 만다. ‘케서린씨.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번 만큼은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진우.’

 

 

  감미로운 선율들이 연주되는 사이 숀의 두 손은 위아래로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다. 박의 맺음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 그의 움직임은 민첩하게 변해간다. 콘트라베이스의 깊은 비장함, 첼로의 심장하고 심원한 갈등, 비올라의 심오한 무거움, 그리고 그것들과 뒤섞인 바이올린의 나렵한 들뜸이 리듬을 타고 홀안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강한 음이 발화된 후 윗팔과의 경직된 듯 수직을 이루고 있는 그의 오금자리과 손목은 예전의 부드러움을 그대로 유지하며 느린 템포를 쉽사리 유지해 나가고 있다. (클리킹 타법과 비슷. 클리킹은 18세기 후에 개발됨.) 그의 얼굴에선 백지장 같이 순하고 깨끗한 표정들이 배우처럼 연기되고 있었다. 숀의 표정은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신선과도 같다. 이 빈틈없는 의식은 신의 은총을 입은 특별한 존재가 타고난 그의 순수한 열정을 누군가에게 몰래 들키는 인상을 모인 모두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부드러운 감정을 실은 숀의 표정은 두 손과 연결되어 둥근 곡선을 허공에 만들어 주고 있다. 피날레 후 곧이어 간간히 들려오는 관중들의 기침소리와 차분한 박수소리, 그리고 곧이어 떠들어대는 관중들의 웅웅거림이 이어진다. 복도를 지난 캐서린이 그들 앞으로 걸어나와 비어있는 무대 중앙에 선다. 무대라고 해봤자 연회실 구석에 놓인 의자 몇개와 피아노포르테에 불과하지만 모두는 케서린이 걸어나온 구석을 여지없이 주목하고 있었다. 아무도 무대위에 등장한 케서린이 누구인지 모르는건지 장내는 웅성웅성 소란스럽기만 하다. 더블 콘체르토가 준비되자 숀은 모인 관중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주위를 끈 다음, 서 있던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난다. 바이올린들이 계별적인 조율을 끝마치자 공공적적한 우주적 고요함을 담은 적막감이 주위를 거세게 감싸기 시작한다. 가장 낮은 G선의 길고 진득한 울림으로 주위 모든 사물들이 일제히 울렁거리고 있었다. 심령을 울리는 그 깊은 소리는 느긋한 자세로 관람에 임하던 모두의 시선을 바짝 긴장시키며 깨우기 시작했다. 아늑하고 고운 G선의 선율과 간결하게도 짧은 비브라토를 뒤로 조합된 음들이 조금씩 높아져 가고 있다. 그 간결한 음은 탁하고 지저분했던 장내를 환기시키는 작용을 해주었다. 모두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긴장감을 추스리며 케서린의 손놀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분주하게 현들을 돌며 벌어진 사이들을 쉽게도 건너 뛰는 현란한 손동작, 잠시의 농간없이 굽어진 계단을 단숨에 달려 올라가듯 음계를 뒤죽박죽 과감하게 엉켜가는 핑거링이 이어지고, 브릿지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까지 외출한 유연한 손가락들이 자유자제로 지판 구석구석 저 멀리까지 뻗히고 있었다. 쿠뻬(Coupe: 발레, 자리기)와도 같은 작은 동작들이 지판에서 지판 사이로 취해지고, 중지에서 검지로, 장지에서 약지로, 두두리듯 추진력이 가세된 손가락들의 분주한 추격전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나비처럼 춤추던 핑거링은 어느덧 샤쎄(Chasse: 발레, 따라가는)와도 같이 선두에선 손가락들의 그림자를 일제히 쫓아가며 출렁이는 물결을 이룬다. 오른손들이 방해받는 것을 피하려는 심산인지 말총이 받침대와 가까워지고 있다. (술 폰티첼로: sul ponticello) 날카롭고 강렬한 소리가 이어진다. 활의 운용은 갈수록 윗부분으로 좁혀져 가고, 기미하고 기묘한 변주의 뒤섞임을 뒤로 미묘한 느낌을 담은 강한 고음들의 행진이 모여있는 무리에게 반전처럼 들려온다. 활이 한 번을 내려긋는 동안 지판을 집는 무절제한 핑거링은 셀 수 없을 만큼 그 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또렷하고 분명한 음들의 운주가 이어지고, 쏟아진 관중들의 여흥을 불러들일 사이없이 격렬한 리듬을 드센 기운으로 바짝 따라가기 시작한 제 2 바이올린 화음이 모두의 귓전에 정신없이 파고들고 있었다. 두 바이올린의 협주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신성함으로 이끄는 견실한 행위이자 맑고 상쾌한 가상적 세계를 모인 모든 사람들 앞에 펼쳐주고 있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눈부심이 그 안에 살아 숨쉬고, 과거에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느낌들이 속속히 그 소리의 진동들 속에 살아 펄떡거리고 있었다. 순수한 소녀의 들뜨고 여유로운 마음이 음절마다 뚜렷히 보여온다. 투정스런 눈빛 뒤 즐거움을 되찾은 아이의 눈부신 해맑음이 전해오고, 비단처럼 부드럽고 천사처럼 상냥한 느낌이 그 안에 차분히 묻어져 나오고 있었다. 비록 여의치 못하고 녹녹치 못함이 들어난 처녀의 고집스러움까지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여리고 애초로운 여인의 마음속 깊이 생겨난 작은 그늘까지 현들이 질러대는 음들과 마구 뒤섞여 연회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것으로 음악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이것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특별한 협주가 되어가는 중이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또 한 명의 천재 음악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새 생명의 기원은 달갑게 외부에 그 윤각을 손쉽게 드리운다. 간난이의 고운 피부처럼, 피덩이의 울부짖음과 같이 쏟아지는 이 음률은 저녁의 짙은 음영처럼 모인 관중들의 마음을 동화시키며 자신의 만가지 잔상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누구도 케서린과 똑같은 성장통을 겪지 않아서 일 것이고, 어쩌면 그녀처럼 풍부한 감성과 차분한 심성을 똑같은 곡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숙함으로도 녹여내지 못하는 여리고 억센 자아와 불안함이 격양된 케서린의 눈동자를 지나 눈초리 아래로부터 턱까지 슬며시 번져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그녀의 연주를 감상하는 숀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그녀의 연주를 흡족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인 모두들 넋이 나간 표정이다. 좀전 오케스트라의 연주때 손으로 입을 가려가며 옆사람과 잡담을 나누던 부인 마져도 그들의 콘체르토에 홀린 표정을 지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관중들 중 이 신비한 선율에 좀처럼 시선을 빼기지 않은채 주위 몇몇의 동정을 조심스레 살피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날카로운 안톤의 눈빛은 빈틈없이 좌우로 비춰지며 모인 청중들을 하나씩 꾀뚤어보고 있었다.

 

 

  푸른 잎새들이 들끓기 시작한 언덕과 완연해진 봄의 기운 알리는 높디 높은 창공속 종달새의 깔끔한 목청이 은밀히 창가로 스며들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새로 피어난 푸른 나무잎을 관찰하는 소년의 태도는 차분하고 평온해 보인다. 수려한 그의 외모와 붉게 홍조를 띤 애띤 얼굴상이 소년으로부터 밀려나온다.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로 부터 방향을 바꿔 돌아선 그가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는 연회실을 관심있게 지켜보기 시작한다. 연회실은 북적거리며 떠들어대는 손님들로 가득하다. 소년의 초점잃은 눈망울은 뜻하지 않게 자신을 엄습해오는 감정에 몹시 괴롭다는 표정을 일관한다. 오똑한 코와 하얀 피부 위 들어난 그의 뽀얀 볼 위로 그림자가 속속히 드리우고 있다. 소년의 등 뒤 눈부신 햇살이 싱그러운 바람과 동무삼아 활짝 열려있는 커다란 창틈을 통해 자유롭게 내부를 넘나들고 있었다. 창가까지 뻗은 나무가지는 자신의 손을 한껏 흔들어대며 자신의 존재를 소년에게 알리려하고 있었다. 하얀 브라우스와 쥐스토코르, 하의로 입은 고동색의 바지(breeches), 그리고 곱슬진 하얀 가발을 머리 위에 뒤집어 쓴 케서린은 영락없이 곱상스런 소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푸른 상의 위로 금빛을 발하고 있는 단추들과 그녀가 두 팔을 움직일때마다 비좁은 소매에 매달려 치렁거리던 러플이 한 눈에 들어난다. 다만 의상 뒤에 숨은, 봄의 향기를 쫓던 작고 왜소한 소녀의 뚜렷한 이목구비까지는 좀처럼 감추어지지 않고 있었다. 연주가 끝난 상태에서 참석한 몇몇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긴밀히 상의하고 있는 숀의 표정은 왠 까닭에서인지 저조했던 오전보다 무척이나 활기차 보인다. 그는 위세 가득한 표정으로 주제넘게 거드름을 피우며 상대의 질문에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호응으로 잔뜩 고무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흐믓한 표정의 숀 크리스토퍼 자작은 더할 나위없이 온통 기꺼운 마음에 젖어있었다. 그는 남들이 이루지 못한 큰 일을 자신이 해냈다는 사람의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대화 상대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 가장된 제스처과 꾸며낸 미소를 그에게 아끼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크리스토퍼 자작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숀 크리스토퍼는 간혹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마에 주름을 잡고 가벼운 인상을 쓰기도 했다. 생기가 가득해 보이는 크리스토퍼 자작은 종종 윗니를 들어내며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기도 했다. 자만심 어린 눈동자와 자부심 마져 가득 깃들여 있는 자작에게 정작 그들의 화제대상인 케서린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케서린은 무리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지 한쪽으로 비켜 서서는 자신에게 꼿히는 주위 여럿의 따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무엇인가 할 꺼리를 찾아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조금 멀리 떨어진, 좀전에 그녀와 짧은 인사 몇마디를 나눈 지오바니 백작이 어느세 그 앞에 나타난 젊은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바이런 남작이 아닌가. 자네도 참석할 줄 알았네. 그럼, 그렇고 말고. 자네가 음악을 무척 좋아하지 않나. 더블 콘체르토를 듣던 중 자네와 종전에 감상하던 바로크 콘체르토 그로소(Baroque era Concerto grosso)를 생각해내던 참이야. 아마 바흐라는 친구가 작곡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지? 아참, 내 정신좀 보게. 소개하지. 이쪽은 파이트로 크레이머 경, 저쪽은 주세페 안톤 경이네. 둘 다 내가 아끼는 친구들일쎄. 그리고 여기는 헨드릭 바이런 요하네스 남작이네. 인사들 하게나.” 지오바니 백작이 자신 앞에 서 있던 두 명을 바이런 남작에게 소개한다. 크레이머 경이 서둘러 남작에게 악수를 청하자 멋쩍은 표정으로 그들 앞에 서 있던 바이런 남작이 쑥스러운 표정을 뒤로 크레이머 경에게 불쑥 손을 내민다. 크레이머 경과 남작이 악수를 나누는 사이 안톤의 눈동자는 종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와는 달리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는 눈치가 그의 표정에 희미하게 어리어 있었다. 남작은 자신을 향해 빛나고 있는 안톤의 눈동자를 못 알아보고는 겸연쩍은 표정을 숨긴 안톤 경에게 정중히 인사를 청한다. 경계심과 함께 남작을 수상쩍어 하던 안톤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그의 인사에 화답하는 차에 얼른 오른손을 내민다.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요즘 다른 볼일들이 많이 생겨버려 자주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백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해왔다. “그럼 이 사람아. 한동안 연락이 없더니만 다 일이 있어서 였구만. 나도 잘 지내고 있네. 가만. 그리고 이곳까지 온 김에 룩셈부르크와 메스를 거쳐 랭스로 돌아갈 생각이네. 룩셈부르크를 지도상 보면 마치 천사의 날개처럼 생기지 않았나. 그 만큼 그곳 생활의 질도 높다고 생각이 되네만은. 남부지방인 몬테카를로에서 온 모나코 공이 어찌나 같이 횡단을 떠나자고 부탁해 오던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네. 한두 달은 족히 걸리게 분명해. 내가 없는 동안 자네가 부탁한 물건이 오면 자네에게로 곧바로 서신이 갈 것이네. 그럼 내가 없더라도 부디 찾아와 물건도 찾고 쉬었다 가게나.” 백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헨드릭 바이런 요하네스 남작은 가끔 케서린이 서 있는 곳을 힐끈거리며 시시탐탐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케서린은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스쳤는지 백작과 남작이 서 있는 곳을 여러차례 돌아본다. 하지만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 그녀는 결국 알수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려본다. 짧게나마 스친 케서린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남작은 고개를 돌리며 아직까지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요하네스 남작을 위아래로 차근차근 뜯어보던 안톤은 간혹 고개를 꺽어 케서린을 살피려 시선을 창가쪽으로 돌리고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연주회는 어땠나.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 저기 서 있는 소년의 연주가 가장 독보였다고 생각하네만. 가만, 자네 저 친구와 인사는 나누었는가? 서로 잘 모르는 사이라면 이 기회에 나를 통해 소개를 받지 그러나? 나도 잘은 모르는 사이였지만 오늘의 호스트인 모나코 공에게로 부터 나도 얼마 전 소개를 받았다네. 그에게 자네가 느낀 점을 말해준다면 그가 좋아할 것이네.” 지오바니 백작은 대화중 남작의 등에 자연스럽게 손을 언지며 소년이 서 있는 곳으로 그를 인도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이 사라지자 이윽코 테이블 근처에서 간식을 주어먹던 베르디가 혼자 서 있는 안톤에게 다가온다. 베르디는 조심스레 좌우 주위동향을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다. “맙소사. 자네, 알고 있었나?” 안톤은 알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에 하느님, 맙소사! 어찌 이런일이. 이게 있을 법한 일인가. 제발 내 두 눈이 헛것을 본다고, 틀렸다고 말해주게나. 남장소녀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겠나?” 베르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연거푸 지으며 탄식한다. 그리고 어깨 위까지 치켜든 손으로 가볍게 바람을 가르는 제스처를 안톤에게 보인다. 베르디의 느닥없는 반응이 너무 컷던 탓인지 안톤이 장지손가락을 콧등에 가져다 대며 그에게 주의를 준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안톤이 조용한 음성으로 베르디에게 대꾸하기 시작했다. “암,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예전에 누구와고도 내가 알려준 사실을 나누지 말라고 한 것일쎄. 재밌지 않은가. 모두들 저 소년의 연주 이야기 뿐이야. 아니지, 소녀 한 명이 모두의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는 말이 맞지. 정작 소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다고 짐작해.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 하지만 자네가 꼭 주의해 주었으면 하네. 아직은 우리가 앞서 나설 차례는 아니니까 말일쎄.” 대답을 마친 안톤은 미소를 지으며 케서린과 남작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곧이어 케서린에게 다가가던 남작은 무엇인가를 부자연스러운 제스처를 뒤섞어 백작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연회장을 급하게 빠져나가 버린다. 안톤의 맹수같은 눈빛은 놓치지 않고 그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오늘 펜싱 경기 관람은 어떠셨습니까, 부인?” 하얀 가발을 뒤집어 쓴 신사가 은빛 구로 장식한 검정 지팡이를 팔뚝 사이에 낀 상태로 가볍게 허리를 구부리며 클레라 부인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핀다. 단정한 정장차림의 신사는 무척이나 교양있어 보였다. 배려가 담긴 사리엘의 점잖은 몸가짐과 상대를 존중하는 말투, 그리고 겉으로 자연스럽게 들어나는 그의 겸손함까지 말이다. 예의 바른 사리엘의 행동에 비해 그의 얼굴엔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짐작컨데 그 이유는 그의 침착성이 상대에게 그런 인상을 무의식 중에 심어주고 있는 까닭에서일지도 모른다. 차분한 표정의 사리엘은 오른손으로 지팡이 끝에 매달린 은빛구를 버릇처럼 쓰다듬으며 클레라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클레라는 대답 대신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좀전까지 관람한 펜싱 경기의 활기로 인해 여흥이 채 가시지 않는 흥분된 표정을 겉으로 들어내고 있었다. 한편 조용한 사리엘에게서는 자신감과 기세가 표정없는 얼굴 뒤 몰래 감춰져 있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말끔한 정장차림의 웨이터가 기포가 연신 떠오르고 있는 샴페인 잔을 그들에게 권해온다. 둘 다 아무런 거부감 없이 웨이터가 권하는 잔을 집어 한 손에 들고는 소파가 놓여있는 거실 중앙으로 향한 후 편하게 자리를 잡는다. 클레라의 화려한 분홍색 와토(Watteau)가 끌려가고 있던 이국적인 당초문양이 새겨진 카페트 위엔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콘솔과 쇼파탁자가 놓여 있었다. 소파 밑에 자리한 붉은 카페트 반대편 위엔 벽을 등지고 있는 하반신만을 얇은 천으로 겨우 덮은 반 나체 여인의 조각상이 가슴과 허리라인을 적나라게 들어내며 수줍은 표정을 그들에게 짓어오고 있었다. 클레라는 견고하게 완성된 가구들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좀처럼 그것들에게서 두 눈을 띠지 못하고 있다. 그때까지 꼼짝않고 몸을 웅크린채 소파 위에 평온히 낮잠을 즐기던 줄무늬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놀란 눈을 치켜뜨며 곧바로 쇼파에서 뛰어내려 번개같이 달음질을 친다. 어느세 도망쳤던 고양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턱에 멈춰서 있다. 새끼 고양이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동안 침입자를 경계의 눈빛으로 지켜보던 고양이가 드디어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예고없이 자신의 공간을 침입한 낯선 여인 바로 옆 낮익은 주인을 알아본 새끼 고양이는 곧 사리엘 발 밑으로 다가와서는 자신의 꼬리와 허리를 그의 복사뼈 부근에 부벼대기 시작한다. 사리엘이 손등으로 고양이 등을 쓰담자 기분이 좋아진 줄무늬 새끼 고양이는 연달아 가르르 낮은 소리를 낸다. 샴페인으로 입안을 가볍게 적신 사리엘이 둘 사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뀌 보려던 심산에 대화를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사리엘이 샴페인 잔을 들자 아비 아 라 프랑세즈(habit a la francaise) 끝에 들어난 하얀 소매 위 장식용로 채우는 투명한 녹주석의 커프스(cuffs)가 반짝거린다. “혹시 오늘 펜싱 경기가 재미 없으신 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번에는 좀 더 나은 오락거리를 준비한 후 부인을 초대하겠습니다.” 클레라가 곧바로 그에게 대답해 왔다. “아니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런 자리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어요. 좀전 우측의 선수가 보여왔던 리뽀스뜨(Riposte)는 정말 인상적이 였어요. 어쩜 그렇게 재빠르고 민첩하게 대처 할 수 있는지 저로써는 정말 놀라울 뿐이에요, 사리엘 공작님.” 클레라가 경쾌하게 웃으며 그에게 대답하자 사리엘 역시 그녀에게 화답의 미소를 지어보인다. “날씨가 풀려서 야유회도 곧 갖게 될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클레어 부인도 꼭 오셨으면 합니다만은. 분명 시간을 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리엘 공작이 클레어에게 대화를 붙이는 사이, 치열한 경기를 벌였던 두 청년이 미소 띤 얼굴로 서로와 경기내용을 나누며 그들 앞으로 걸어온다. “아참, 제 정신좀 봐요. 부인께 이 친구들을 아직 소개해 주지 않았죠? 이쪽은 제 사촌 동생인 바딘이고, 저쪽은 스나이더라는 친구입니다. 스나이더는 제가 자주가던 펜싱클럽 모임에서 만나게 된 인연입니다. 간혹 저 친구가 시간이 날때마다 제게 개인레슨을 시켜주기도 합니다. 어서들 인사드리게.” 사리엘 공작이 제촉하듯 그녀를 그들에게 소개 시킨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바딘 로카텔리라고 합니다. 저희 경기가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흡족하셨기를 바랍니다.” 클레라가 곧바로 그들에게 대답해 왔다. “바딘씨, 그리고 스나이더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처음 펜싱경기 시작부분에서 두 분이 갖춘 동작이 빠뜨망(Battement)이라고 공작님께서 친절하게 설명을 붙여 주셨어요. 다른 내용들도 많이 설명해 주셨는데 제 기억력이 조금 짧은가 봅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두 분의 경기는 오랫동안 기억날 만큼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자유자제로 두 분이 움직이시는 것을 보니 저 같은 몸치도 흥이 절로 났답니다. 다음번 기회가 된다면 꼭 두 분의 경기를 다시한번 지켜봤으면 해요.” 바딘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왔다. “즐겁게 관람하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빠드망이란 것은 상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역공을 할 수 있는 자세로 상대를 유인해 내는 겁니다. 아마도 그 부분이 연극처럼 돌발상황을 연출했을 겁니다. 우선 앞발을 뒤로 뻗어 방어자세를 취한 다음, 구부정한 기마자세와 마찬가지로 검을 들은 손과 앞발을 전진시켜 상대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참 샴페인을 비우던 사리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인. 말씀나누시던 중 실례지만 지난번에 계획하신 연주회는 어떻게 진행이 되어가시나 궁금합니다. 부인께서 다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장소가 필요하시거나 행여 인력이 부족하시면 제가 후원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빠리에서 모셔온 연회 조리사 역시 대여해 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친구 전문이 에피타이저와 해산물 코스입니다.” 투명한 금빛의 액체가 담긴 샴페인 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클레라가 흐틀어진 와토를 고치며 그에게 대답해 왔다. “연주회는 잘 준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손이 필요로 하게되면 장 보드리야르 씨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전에 구경시켜 주셨던 악기는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지난 번에 완성되지 않은 악기를 한번 보여주신 적이 있었죠? 정말 깊고 절묘한 음향을 만드는 물건이였어요. 어쩌면 두꺼워진 옆판과 얇아진 공명판이 더 크고 풍부한 음량을 만드는 걸까요?” 클레라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리엘을 쳐다본다. “아, 지난번 방문 때 잠시 보여드린 바이올린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부인. 그거라면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 연주회 용으로 대여하신 바이올린과 비슷합니다. 같은 친구가 만들었으니까요. 제가 느끼기엔 젊어 보였지만 그 친구가 그 분야에선 적지 않은 나이였던지 작업 진행이 생각보다 느린가 봅니다. 그 친구 설명에 따르면 전보다 목과 지판이 길어졌다는 것과 줄받침이 전보다 상당히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고상하고 깊은 소리를 자아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친구 성격이 워낙 까다로워서 그런지 몰라도 사용된 목재가 자기 마음에 않들었던가 봅니다. 저에게 얼마전 푸념같은 불평을 한없이 늘어 놓더군요. 불같은 그의 성격에 지난번 구경하신 악기는 이미 부숴버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리엘 공작이 털털하게 웃기 시작하자 클레라가 그를 따라 미소를 짓는다. 옆에 서 있던 바디과 스나이더도 그들과 동조해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진우가 취해온 기습적인 행동에 케서린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옅은 쌍가풀과 찰랑이는 진한 금빛의 곱슬, 지긋이 내려앉은 눈꺼풀, 그녀의 초조해 보이는 눈빛과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리는 소녀의 조그마한 심장은 여간하여서는 진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좀전 초췌해 보이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론가 순십간에 증발해 버렸다. 한편으로 케서린은 불연듯 자신에게 찾아든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을 다급히 정리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숀 크리스토퍼 자작이 자신을 찾아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을거라는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급하게 진우의 손에 붙잡혀 뛰어온 탓에 그녀는 상황을 정리하기에 앞서 우선 숨 고르기에 바쁘기만 하다. 한편 진우는 자신의 돌발적인 행동에 적당한 구실과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던지 그녀의 놀란 눈빛을 차분히 대처하고 있었다. 잠시지만 그에게서 야수와 같은 표정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비록 모순적이기는 하나 진우는 주위에 누군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스런 표정을 머금으며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기 시작한다. 말없이 서 있는 둘 사이 분위기가 조금은 서먹했다. 이윽코 주위가 예상처럼 조용하다는 것을 깨닮은 그가 조금은 언짢은 기색을 들어내며 케서린에게 대꾸하기 시작했다. “왜 답장을 하지 않았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불완전한 사랑의 감정이란 도데체 무엇일까. 시들어 버린 것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가.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랑이란 행위의 자취나 경험에 따른 흔적들의 부재 때문인가. 어디서 부터가 한 인간이 가꾸고 키워갈 수 있는 사랑의 시작점이며, 또 어디서 부터가 그 형태를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의 시초일까. 그 무한한 감정의 오묘함이란 결코 쉽게 감정되지 못한다. 그 어떠한 인격체라 해도 그것을 쉽게, 그것도 선뜻 삼자에게 능숙히 설명하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둠속에서 회색빛을 띠우며 자신의 그림자 조차 잃어버린 고독한 영혼으로 그것을 어느정도 식별하여 설명 따위를 덧붙일 수는 없을까. 어두운 잿빛속에서 차오르는 조바심과 좀더 태우지 못했던 측은한 미련을 죽여가며 사랑하는 대상을 그려가는 행위는 곧 완성되지 못한, 비록 조각나 버린 사랑의 허물같은 감정이라 짐작해야 옳지 않을까. 꿈틀꿈틀 고목 속에서 움실거리는 애벌레가 마침내 고치를 치기 시작한 일에 정작 빗대야 하지는 않나. 요동치던 감정의 폭풍 뒤 경미하게 남겨진 그 특별한 궤적들, 그런 조각들이 시간의 흐름과 동해 스스로를 추궁하고 자신 스스로를 촉박 속에 밀어 넣고야 만다. 그 시작함과 동시 사랑을 바로 그 즉시부터 따라올 저주, 원인을 알 수 없이 찾아드는 현기증, 어떤 충동적인 자극, 충격 뒤 말없이 찾은 흥분, 자존심이 꺽긴 후 생겨난 모멸감, 시시때때로 찾은 울렁거림, 직관적이지 못한 나태에 빠져 버린 어리숙한 이성, 매슥거리며 두려워 하는 가슴, 사사로운 일상에 도둑같이 찾아든, 그리고 기술하지 못하는, 보통 그것을 생각하므로써 생기는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그 짧고도 영원한 순간, 혹 찌꺼기처럼 걸려진 허물같은 원망의 감정들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미련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신중하지도 못하며, 그 밖에 더 어리석게도 거듭 그 앙칼지게 가시돋은 거스러미 조각을 주워담는 행위가 버릇처럼 번복된다. 때론 건방지고 교만해진 이성은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을 저만치 내버린 채 스스로 지옥과 천국행을 자의적으로 번복하고는 한다. 순백의 감정은 결국 사랑이라는 행동의 시작함과 동시 수증기처럼 하늘위로 증발되어 버리는가. 그는 무엇을 불지르고 있는 것인가. 관계가 성립되고 순풍하기 시작되는 과정에서 처음 그 순수함은 오전 호수가를 휘덮던 짙은 안개처럼 어느덧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황록빛의 잎사귀 같은 그 애틋한 첫 느낌은 밝은 그 색채와는 달리 유독 예리하고 뾰족한 톱니 가시로 발전되고는 만다. 통통한 버찌가 열린 벚나무의 싱싱함과 가시 사이사이 말없이 숨겨둔 독성의 푸른 잎들을 동시에 소유한 외로운 나무와도 같다. 그 우거진 감정의 숲은 불완전의 공존이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던 둘 사이는 이미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개연(蓋然), 그건 조금씩 그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단정할 수 없는 미연(未然)의 짙은 미풍 역시 그녀에게 불어오고 있었다. 언덕에 널려있는 잡풀과 난초에 불어닥친 감연(欿然)한 기운이 한 발짝 성큼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씨앗으로 부터 막 싹을 티우기 시작한 식물처럼 사방으로 깊숙히 뿌리를 내려가며 영양분을 찾아 열심히 상하좌우로 뻣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이성을 갖춘 한 인간의 본능적인 사고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은 정신적 교감이 교차되고, 내적인 친근감, 정열적으로 뜨거운 상대와의 진득한 눈맞춤은 그들의 관계가 관능적으로 발전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둘은 순수하게 시작한 이 감정이 욕망으로 발전될 것을 앞서 눈치채 일찌감치부터 순결을 사리며 쉽게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인가. 타고난 그녀의 작고 유희적인 몸짓들은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충족되지 못한 그의 본성을 천천히 자극했다. 그는 전율했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해 조금은 어색한 매무새를 뒤따른 그녀의 요염한 눈빛, 찾아든 불안과 기쁨에 함께 떨리는 맑은 눈동자, 지나치게 흘러내리는 산뜻함, 그리고 성숙해져 가는 그녀의 하반신 곡선들은 한껏 아리따운 그 자태를 상대에게 무한히 뿜어대며 자신 앞에 서서 지적인 알몸을 들어낸 벌거숭이 이성을 한없이 유혹하고 있었다. 그는 몸서리 쳤다. 상대는 순수하게 자신을 들어내 보였다. 상대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곧이곧대로 순수히 받아 들이고 있는걸까. 청순한 표정을 지은 그녀의 모습에서 반사된 맑고 선량함이 그 앞에 적절히 녹아져 내리고 있다. 봄을 노래하는 그녀의 고운 육체는 상대의 정신마져 혼미시키며 지배하려 들었다. 거짓의 찌꺼기들은 모두 걸러져 나가버린, 오직 순수하고 순진한, 평온한 감정들만이 서로에게 교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떠돌이 별들의 속삭임과 자연의 순수한 속삭임과도 비유할 수 있다. 그는 그녀가 끊임없이 지어오는 능동적이고 활달한 교태에 말없이 홀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유혹과도 같았다. 그가 다음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 올지는 정말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탐색을 중지한 케서린이 새침한 표정으로 그에게 점잖히 말해왔다. “그럼 진우 씨는 왜 저에게 연락하지 않았나요? 진우 씨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잖아요... ... 혹시나 당신이 찾아오지는 않을까하고 연주회때 많이 기다렸어요. 결국 당신은 제 연주를 보지 못했네요... ...” 원망과 애초로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케서린이 그에게 대꾸해 왔다. 소녀의 작은 심장의 떨림이 그 짧막한 몇마디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는 간소한 이 몇마디를 전하기 위해 지금껏 수일간을 참아왔다는 서운한 표정을 그에게 지었다. 그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진우에게 전처럼 다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말 뒤 진우는 갑작스레 찾아온 이 알 수 없는 느낌에 젖어 마치 심장이 녹아내림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오래동안 간직했던, 수년동안 쌓아왔던 견고한 아성이 조금씩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그 낯선기만 오래된 아집은 허물과도 같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매우 초라하다고 느꼈다. 케서린은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조금은 불안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좀전 머리속을 떠다니던 케서린의 망설임들은 어느세 설램으로 채워져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불필요한 절차는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진솔한 생각을 담아 그에게 물어왔던 것이다. 어둠속에 자신을 숨긴 그들은 창피하게 들어난 자신들의 표정을 어느정도 감출 수 있었다. 그들은 신의 계율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차오르는 거친 숨소리나 꼭 쥐은 서로의 손을 통해 전해 내리는 따스한 체온, 심장의 박동, 맥박의 진동, 그리고 줄어들지 않는 희미한 떨림 따위는 은폐할 수 없었다. 구름처럼 피어난 어둠의 안개 사이로 둘의 보이지 않는 다툼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산과 염기라는 기운들이 서로를 향해 견주는 투쟁, 어처구니 없이 꼭 존재해야만 하는, 비록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두 기운, 각각의 특성을 지닌 두 가지 기운의 공존, 또 그것들이 서로의 담을 끊임없이 넘나들려 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우는 그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이 기원을 알수없는 이상한 감정을 좀처럼 해석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갈증,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미칠듯 깊은 갈망, 심령과 정신의 근원조차도 포기하게끔 만드는, 한없이 한 가지를 갈구토록 만드는 이 형체없는 존재가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숨어 주기적인 맥박의 파동을 빠르고 세차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 새로움은 저주처럼 그의 머리속을 온통 뒤흔들어대며, 한 소절의 간미롭고 달콤한 시처럼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찾아든 이 갑작스럽고 놀라운 감정은 전에 그가 느꼈던 그 어떤 갈증과도 감히 비유될 수 없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이 신이 내린 달콤한 저주의 전주라 해도 비록 그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집어 삼켜 버리겠다는 각오가 서려있었다. 그의 눈빛은 어떠한 결과라도 순응하겠다는 결의마져 흐르고 있었다. 진우는 그녀를 애틋하게 생각했고, 지금 그는 그녀를 마음속 깊이 담아두려 하고 있었다. 그는 꼭 잡은 그녀의 손을 잠시도 놓지 못한채 헤쳐진 마음을 기워내며 어떻게든 자신이 벌려놓은 상황을 수습하려 마음먹고 있었다. 어둠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수분처럼 증발되어 버린 오후, 차분하게 출렁이는 활엽수 아래 둘은 찾아든 어색한 감정에 몸둘바를 모르며 혼란스러움에 휩싸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평정심을 잃은 그의 가슴은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들뜬 그의 감정은 경련을 이르키며 주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엇인가 말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진우의 입은 좀처럼 아무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의 머리속이 온통 하얗게 변해 버린 것일까. 기선을 빼앗긴 그가 좀전 케서린에게 정곡을 찔려 버려서 일 것이다. 어색한 침묵을 뒤로 둘은 누가라고 할 것 없이 자신들 앞에 펼쳐져 있는 오솔길을 따라 슬슬 걷기 시작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십자화과의 황새냉이, 가시털 모양의 쐐기풀, 그리고 마주난 모양의 잎을 조금씩 들어내기 시작한 선옹초 사이에서 봄 벌레들이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우거진 숲풀들과 활엽수들은 예고없는 그들의 방문을 반기는 듯 가지들을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맑은 하늘을 바라보던 진우가 머쓱한 표정을 숨기며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존재하지. 이렇게 고요한 밤에 산책을 하게된다면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어김없이 세어보게 돼.” 둘은 아직까지도 꼭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케서린은 그가 말하는 하늘로 두 눈을 돌렸다. 그녀의 눈망울은 별빛에 비춰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매운 별들이 초롱초롱 지상으로 그 작고 가느다란 빛 줄기를 계속해서 뿌려대고 있었다. 그 옆엔 구름으로 반쯤 가려진 만월(滿月) 역시 불티처럼 초롱초롱한 별들 옆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두 개의 고리무늬와 그 뒤 꼬리가 달린 별자리는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아폴론 때문이야. 언젠가 가브리엘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지. 공교롭게도 아폴론은 시, 음악, 그리고 예언의 신이기도 해. 그래서 인지 몰라도 자꾸 기억하게 되는걸. 주위도 그의 음악성을 탐탐하게 여겨왔던지 아폴론은 어느날 우라니아로부터 음악가 리노스와 오르페우스를 선물받게 되지. 그렇다고 그의 예언능력이 그 누구에게 비해서 뒤떨어지지는 않아. 그는 트로이 왕인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Kassandra)를 얻기 위해 그녀에게 예언의 능력을 주었기도 하지.” 긴장이 풀린 케서린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대답해 왔다. “가브리엘 신부님이라면 진우씨가 어렸을 적 목공을 가르쳐 주신 분이라고 했죠? 언제 기회가 대면 그 분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요. 진우 씨가 말한 것처럼 중후하고 덕망이 높으신 분이 분명할 꺼에요. 그리고 사실 전 음악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진우 씨가 말해준 아폴론에 대한 내용을 전혀 몰랐어요.” 케서린이 잠시 대화를 끊고 진우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핀다. 그의 시선은 하늘에 꼿혀있다. 진우는 다음 대화 내용을 머리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녀가 말해왔다. “근데 이곳에서는 대도시보다 별들이 참 잘 보이네요.” 케서린은 다시 별들에게 시선을 빼았기고 있었다. 잠시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진우가 말해왔다. “어느날 목이 무척이나 말랐던 아폴론이 자신이 키우던 까마귀에게 심부름을 시켰던거야. 하지만 까마귀는 무화과 열매를 까먹느라 늦게 돌아오고 말아. 결국 까마귀는 아폴론에게 거짓을 고하고 말았지. 그리고 신은 분노하고 말아. 그외 그가 키우던 까마귀는 여러가지 실수들을 범했어. 당신처럼 아름다운 테살리(Thessaly)의 크로니스가 아폴론의 여인이였지. 하지만 까마귀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아폴론에게 알려 버린거야. 피우스까지 낳은 그녀는 곧바로 죽음을 당하지. 그런데 까마귀가 정말 거짓말을 했을까... ...” 그의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케서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과 함께 살며시 실소를 짓는다.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진우는 아직까지도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불처럼 쏟아오르는 감정을 설명하기에 그는 아직까지 이성에 대한 충분한 경험이 없었다. 고작해야 동네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눈 아가씨라거나 하숙집 메리 아주머니, 그리고 상점이나 술집에서 간혹 보게되는 처녀들이 그가 기억해 낼 수 있는 이성의 전부였던 것이다. 시를 읽고 그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마음속으로 되살려 보는 것이 그가 이성에 대한 감정을 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왠지 두서없다고 생각하여 볼이 붉게 달아 올랐다. 다행히 주위에 깔린 짙은 어둠이 그의 당혹스러움을 숨겨 주었다. “당신은 저를 좋아하나요?” 진우는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답변하기 곤란했던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의 놀란 눈빛엔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다. 얼굴이 달아오른 케서린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하늘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그들 얼굴을 가볍게 스쳐간다. 오후와 저녁 기온차가 큰 탓에 한기가 느껴진 케서린이 부르르 몸을 떨며 진우 옆으로 좀더 가까이 붙어 걷기 시작한다. 한편 진우는 혹시 그녀를 잃어버릴까 쥔 손을 전보다 꼭 쥐어본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그에게로 전해지고 있었다. 한참동안 묵묵히 걷기만 하던 진우가 다시 말해왔다. 그의 어색한 표정엔 지금 자신이 생각해낸 말을 내뱉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하는 갈등 비슷한 것이 서려있었다. “당신의 별도 떠도는 저 수많은 별들 중 분명 어딘가에 있을거라 믿어. 신부님께서 어느날 그러셨지. 한 생명이 태어나면 창공엔 새로운 별이 반드시 등장한다고 말이야. 당신의 별은 분명 지금 어딘가에서 밝게 빛나고 있을꺼야.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의 별은 분명 저 하늘 그 어딘가 청명하고 밝게 빛날 것이 분명해... ... 당신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야. 그 이유가 구지 지적미 때문이라거나, 혹은 당신 주위에서 발하는 관능미라 못박을 필요는 없겠지. '해가 뜨고 달이 비치고 별이 빛난다. 사랑의 음율이 울린다. 사랑의 음율이 시간을 친다. 밤낮으로 음악이 하늘을 채운다. 보이지 않는 악기의 음이 울리고 있다. 하늘은 음(音)으로 가득한다. 음악을 켜는 손도 없이 줄도 없이 음악이 연주된다.' 까비르가 말했지. 귀를 귀울여 봐. 생명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어. 두 눈을 감고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면 더 빨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거야. 푸른 언덕을 정처없이 떠다는 나무잎과도, 혹 배와 꽁무니에서 강한 빛을 자체로 발하는 반딧불이와도, 그리고 개천에서 사는 약싹빠른 미구라지와도 서슴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돼. 지금처럼 진한 흙향기와 풀냄새가 나는 곳에 사는, 부식토를 뚤고 나들이한 갈색 빛깔의 지렁이나 두더지와도 말이야.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만 전수해준 축복이야. 그 자연의 심오한 소리들은 당신에게 자신들의 일상을 일깨워주고 설명하려 들꺼야. 그들과의 교감은 당신의 음악에 큰 영감을 줄 수 있을거라고 확신해.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연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게 일반적인 통념이고, 그 잘못된 인식이 그들의 의식들 마져 한 순간 악마와도 같은 심성으로 지배하려 들고 있어.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좀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는 거지. 그러게 되면 새로운 감각에 대한 개념이 본능적인 시각을 벗어나 지성의 눈으로 사물과 상황을 관찰하고 인식하려 들거야. 그렇지만 그 자극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더 이상의 기로는 주어지지 않지. 그건 오만을 넘어선 방자함이야.” 붉은 태양처럼 치솟은 그의 감정이 그의 잔잔한 음성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둔 하늘아래 환한 불빛을 전하던 달빛이 수수한 둘의 다정한 실루엣을 길 위에 그려주고 있었다. 오후보다 쌀쌀한 날씨때문에 간헐적으로 오슬오슬 떨고 있던 케서린이 얼마간의 정적을 깨고 그에게 말해왔다. “요근래 버릇처럼 당신을 생각해요.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옷단장을 할 때조차 말이죠.” 케서린이 숨김없이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그에게 설명한다. 온갖 상념에 잠겼던 진우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같이 걷고 있던 케서린을 멈춰 세운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쉬르 하쉬르, 라틴어로는 아스마 아스마톤이라고 하지. 술람미 여인과 얼킨 칸티쿰 칸티코룸이라고도 말하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어. 비둘기처럼 하얀 당신의 두 빰과 가늘은 목은 그 여인의 아름다움과도 비유될 수 있고, 또 더 할수 없이 지고한 생명력을 지닌 당신의 음악은 엔기디 포도원의 고벨화 꽃처럼 진한 향기를 발하고 있어. 왜 여인이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 비유되는지 알 것도 같아. 그것은 상대의 염원을 담은, 한 여인의 짧지만 영원한 그 진실성처럼 시간을 초월한 존재감을 말하고 있는거야.” 숨이 막히던 케서린은 시간이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세 둘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솔길로 들어선 그들은 통나무와 벽돌로 지어올려 지붕엔 거적과 나무잎들 따위를 모아 얹은 오두막을 한 채를 발견한다. 처마 밑을 지나 서까래까지 쭉 뻗기 시작한 담쟁이 덩쿨이 푸른 잎들로 오두막을 감싸주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진우가 재치있게 화제거리를 바꾼다. “이곳은 얼마전 내가 구입한 작업소지. 필요한 연장들이나 구입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고 말이야. 비록 협소하고 허름해 보여도 작업을 하는데는 안성맞춤이지. 이곳 말고도 당신이 찾아온 작업실이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살고 있는 곳에선 너무 멀거든... ...”

 

 

  찰흙같이 어둠이 깔린 저녁, 마차전등에서 희미하게 비춰오는 불빛아래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남자와 긴장된 표정의 여자가 낮은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불빛으로 그림자진 둘의 표정은 꽤나 진지하다.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는거죠?” 남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에게 반말로 대꾸해 온다. “그 아이 얘기를 또 다시 꺼내는 의도가 뭐야. 당신이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는 걸. 그 아이 이야기 때문에 바쁜사람을 이 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연락해 온거라면 헛걸음질 했군.” 빈정거리며 상대에게 형식적으로 대꾸하는 남자의 경박한  말투가 인적없은 숲속 외딴길에 메아리처럼 잔잔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야비하고도 가벼운 남자의 몇마디에 여자는 전율에 휩싸여 팔과 어깨를 약간씩 떨고 있었다. 찬 밤공기 덕에 그들이 내뱉는 대화에 영기 같이 하얀 입김이 뒤섞여 나오고 있었다. 수심에 찬 깊은 눈빛을 비춰오던 여자가 다시 남자에게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해왔다. “이쯤에서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젠 자신이 있다고요. 꼭 만나봐야 할 것 같아요. 그 아이에게 들려 줄 말도 있단 말이에요... ...” 남자는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고개를 좌우로 휘젖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남자는 자신의 의사를 여자에게 모두 전달했는지 타고 온 마차계단에 오른다. 곧 여자가 남자의 팔목을 잡자 그는 단호하게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며 마차문을 힘차게 닫아 버린다. 여자는 자신이 타고 온 마차 옆에 서서 사라져 가는 남자의 마차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눈가로 부터 맑은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수피가 벗겨져 나간 통나무는 하얀 속살을 들어내고 있다. 제법 굵은 통나무는 중심부로 들어 갈수록 진한 색채(심재)를 나타내고 있었다. 반으로 잘려나간 통나무의 단면으로는 평행한 나무의 연륜층을 설명하는 목리(나무 결)와 그 문양이 자연스레 겉으로 들어내고 있다. 특출한 목재의 재색으로 인해 권모와 시금배 문양을 뽐내는 표면 위에 진우의 아무진 손길이 빠르게 상하로 분주히 이동하고 있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케서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길만을 두 눈으로 쫓고 있다. 그녀는 좀전에 느꼈던 감정을 아직까지 가라앉히지 못했던지 무척 상기된 표정이다. 자세히 보면 이 조각은 책 정도 크기의 나무판 두 장이 아교로 붙혀져 있었다. 판들은 중심부위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데, 진우는 대패를 이용해 정교하게 그 표면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한동안 나무판을 다듬던 그가 건너편 책상으로 이동해 단풍나무를 구워낸 얇은 조각들을 틀에 고정시킨 후 정확히 여섯군데를 연결시킨다. 그 후 진우는 옆면에 덧대를 고정시키고 있다. 얼마전 구입한 동물뼈를 사용해 접착제를 만들어 놓은 그는 그것이 담긴 투명한 병을 집어 조각 사이사이를 붓으로 조심스레 바르기 시작한다. 바이올린 옆면 모양새가 어느정도 갖추어지고 있었다. 다음 테이블로 옮겨간 그는 아교로 얼마전 붙여놓은 뒤판을 그려놓은 표시에 따라 조심스레 실톱으로 잘라내기에 이른다. 그 후 그는 스고르비아를 사용하여 표면의 상당부분을 밀어낸다. 스크렙퍼로 좀더 세밀한 작업을 마친 그가 대페로 앞판과 뒤판을 말끔히 마무리 하기 시작한다. 심열을 기울려 앞판 위에 에프홀을 그려나간 진우가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실톱으로 그 위에 슬슬 구멍을 뚤어가고 있다. 리마로 그것을 정리한 진우는 준비된 긴 베이스 바를 앞판에 붙인다. 그것을 도구로 고정시킨 그가 앞면에 휠렛띠 두 줄을 열심히 파기 시작한다. “언제부터 이 작업을 시작한거죠? 한번도 만들어 본적이 없다고 예상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만든다는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케서린이 어느세 두번째 휠렛띠를 파고 있는 그에게 질문해 왔다. 진지한 그녀의 눈동자는 한없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을 만난 후 다음 날 부터 바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어. 연장들을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가구를 만들던 연장들을 사용해도 별 무리가 없더군.” 케서린이 다시 물어왔다. “왜 이걸 만드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진우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직은 습작하는 중이야. 이미 망쳐버린 작품도 상당하거든... ...” 케서린의 눈빛으로 향하던 그의 시선이 조용히 옆방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그의 검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케서린은 그가 가르키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실용성이 넘치는 썰매 커피용 탁자, 편하게 보이는 살롱 안락 의자, 도서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큼지막한 책상, 짙은 나무색이 곁들은 이인용 탁상, 서재용 탁자, 단순한 야외용 등박이 의자, 식탁, 어린이 침대(crib) 등등이 보인다. 아직까지 작업에 열중하던 그가 옆방에 들어간 케서린에게 외쳤다. "그것들은 마이클과 합작한거야. 마이클이라고 나와 같은 공방에서 작업하는 친구를 전에 설명해 주었지?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 주문받은 가구들이라 잠시 작업실에 보관중이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말해봐." 그가 극히 상투적인 어조로 케서린에게 물어왔다. 케서린은 놀란 눈으로 그것들을 차근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녀가 느낀 전체적인 작업실 분위기는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난 낡고 너저분한 건물 외형에 비해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가구들은 놀랍게도 더 할 수 없이 정교하고 치밀했다. 마치 허름한 상자안에 간직되어 있는 금은보화 같다고 그녀는 느꼈다. 하나같이 견고하게 디자인된 가구들로 부터 고풍적인 느낌과 공예가의 섬세한 손길 역시 느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정작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다름아닌 산산히 부서져 파편들로 그 모양새를 겨우 설명하고 있는 바이올린들이였다. 어림짐작으로 세어보아도 진우가 이 도시에 머문 것에 비해 작업량이 터무니 없이 많다고 그녀는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한 쪽 구석에 쌓아 놓은 부서진 바이올린들은 어림잡아 대여섯개는 족히 될 듯 했다. 한동안 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옆방으로 틀며 그가 들리도록 평소보다 크게 소리쳤다. “다시한번 피란체에 가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진우씨가 어린시절을 보낸 그곳은 상업적으로 매우 발전한 도시라고 말했었죠?” 작업을 중지한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있는 건너방으로 걸어온다. “당신말이 맞아. 르네상스의 선구자 역활을 감당한 곳이니 그럴 만도 하지. 신이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고전예술을 시작한 인본주의가 꽃핀 도시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예술가들도 상인들 만큼 많이 모여있는 도시야. 그들은 감상과 낭만을 버리고 객관적인 개념들을 예술에 쏟아 부었지. 또 건축가들은 합리적인 원리가 느껴지는 건축물에 자신의 모든 영혼을 불어 넣었고. 광장에 가면 아직도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구경할 수 있을꺼야. 언젠가 그곳을 방문할 기회가 찾아오면 땅거미가 질 무렵에 맞춰 강북 쪽에서 시작해서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아르노 강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본다면 꽤 괜찮을꺼야.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베키오 다리를 지나치게 되면 브루넬레스키가 원통형으로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돔이 보이기 시작하지. 곧 조로의 종탑과 피렌체 대성당이 보일 것이 분명하고. 석양에 물든 꽃의 성모 마리아 대 성당은 분명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을게 분명해. 재미있는 부분은 그 도시가 열정적인 로마네스크가 끝날 무렵 시작해 고딕을 거쳤다는 점이야.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도시에 고딕의 향을 담은 건축물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 그가 말끝을 흐려버린다. 잠시 어색한 기운이 돌자 그녀가 적막을 깨며 그에게 대꾸해 왔다. “그게 역설적이라는 건거요?” 상념에 서린 진우는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얼마 후 그가 말을 이어왔다. “그게 아니야. 과거의 도시라는거야, 내게도 또 누구에게도... ... ” 케서린은 그를 독촉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깊은 수심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케서린은 곧 포기하고 만다. 그녀는 무엇인가가 형체를 구분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 이미 자신 가까이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케서린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간음할 수 없는 실체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음을 깨닮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자신의 의견에 몹시도 인색한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엄청난 해일을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 극히 짧은 찰라에 절정에 도달하기도 한다. 또 사랑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엔 바램에 조차 도달할 수 없는, 그저 바라기만 하는 ‘절대적 이상’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갑자기 서로에게 끌리게 된 완벽한 남남이 상대의 과거를 알수 없을 때, 그래서 억지로 겉만을 이해하려만 들 때 서로와의 거리는 좀더 넓혀진다. 추구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가 손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녀의 괴리된 생각과 의견차로 인해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내게 말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까’ 생각하던 그녀는 진우의 답변을 포기했다는 식으로 입술을 닫는다. 생각해 보면 사실 둘 사이는 아직까지 아무런 관계도 아니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단둘이 그의 작업소에서 몇시간을 같이 보냈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인연이며 그 안에서 특별한 관계가 성립된다고 케서린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정면에서 바라보자 진우의 심장은 좀전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눈빛은 떨리고 있다. 깨진 바이올린 조각들을 다시 더듬기 시작한 케서린의 눈빛에서 불안한 감정을 절제하려는 느낌이 투영되고 있었다. 진우가 무엇인가를 결정했는지 뒤돌아선 케서린에게로 거리를 좁히며 다가간다. 불빛에 비친 그녀의 관능적인 하얀 목덜미가 그의 시선을 유독 자극하고 있었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둘에게 들려온다. 프란체스코는 안쪽에서의 대답 따위는 기다리지 않은채 곧바로 현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온다. “손님이 와 계셨군.” 가볍게 기침을 내뱉은 프란체스코와 누군가의 방문에 깜짝 놀란 케서린 사이에 어색함이 끼어든다. 둘은 조심히 서로의 외관을 탐색하는 눈빛을 상대에게 흘리고 있었다. “내가 실례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이봐 진우 씨. 왜 어제 저녁 아무런 말을 내게 하지 않았던 게야? 손님이 오시는 줄 알았다면 오늘은 나도 내 작업에나 몰두하는 건데 말이야.” 예의상 진우에게 몇마디를 던진 그가 냅다 모자를 벗은 후 케서린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넨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케서린 역시 호의적인 그에게 공손히 답례를 한다. “프란체스코 씨, 이쪽은 바이올리니스트 케서린입니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설명이 뜻밖이라는 놀란 표정으로 캐서린을 제차 뜯어본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처럼 순수함이 흐르고 있었고, 그 뒤에는 애정이 결핍된 숨겨진 그늘이 보였다. 은빛 콧수염을 한차례 만지작거리던 프란체스코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그것은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그는 케서린이 또래의 소녀들 처럼 그저 모든 감정들에 민감할 시기라고만 여겼을 것이다.   

 

 

  “자네, 정말 오래간만이군. 이번 여행은 어땠는지 꽤나 궁금한데. 지난 번처럼 신기한 일들을 많이 접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마이클은 연신 방가운 기색을 들어내며 모하마드에게 말했다. 둘은 마이클이 어릴적 목재공방을 들락거리다가 우연히 알게된 친구다. 어려서부터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러가지 물건들을 수집하던 모하마드는 지역마다 목재 또한 재각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하마드는 마침 아버지 심부름으로 공방에 부탁받은 목재를 운반하고 있었다. 마이클 역시 같은 날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공방에 들렸던 것이다. 공방에 진열해 놓은 목재를 주의깊게 들여다 보던 마이클을 발견한 모하마드가 그에게 다가가 대화를 붙인 것이 둘의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후로 그들은 기회가 닺을 때마다 만나 친구의 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사교성과 붙임성까지 있는 모하마드는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마이클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모하마드에게 언제나 자신의 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모하마드는 여러지방을 다니면서 구입한 진귀한 물건들을 마이클에게 종종 보여주거나 선물하기도 했다. 한 지방에서 이사없이 오랜 세월을 보낸 마이클로써는 그가 보여주는 물건들이나 자신이 가보지 못한 지방에서 그가 보고 경험한 이야기들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였다. “얼마 후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해. 요즘은 소금이 상당히 잘 팔린단 말이야. 텐산산맥을 따라 형성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오아시스길이라는 중앙아시아를 섭렵하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하거든. 그쪽 지방에 진귀한 물품이 많다고 다녀온 상인들마다 내게 그러더군. 아버지를 따라 카스피 해와 카라쿰 사막까지는 가본 적이 있지만 그 이상은 아직 못가봤다네. 그래서 우선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 유대사막을 다녀올 생각이지. 여행을 떠나기전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낙타들을 한 스무마리정도 구입할꺼야. 사해 소금은 자네가 알다싶이 효능이 좋다고 널리 평판이 나있잖아. 그건 둘째치고 자네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사뭇 궁금하군.” 앞으로 방문할 중앙아시아 이야기를 흥분된 억양과 뒤섞어 마이클에게 꺼내던 모하마드는 기대감이 서린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화병처럼 생긴 시샤 받침대 위 사기 깔대기에 담배를 올려놓은 모하마드가 그 위에 열심히 불을 붙여대며 길다란 호스를 통해 깊히 공기를 빨아낸다. 두서너 차례 뿌얀 영기를 빨아 마신 그가 마이클에게 호수를 건넨다. 마이클 역시 두세번 깊이 빨아 마신다음 투명한 연기를 밖으로 내뱉는다. “이번 사용한 담배는 좀전 맛이랑 완전히 다른 걸. 아주 독특해. 이건 대체 무슨 맛이지?” 모하마드가 껄껄 웃으며 마이클에게 대답했다. “이번건 남부지방 천연과일을 절여 담배가루로 만든 것이지. 구하기 힘든 만큼 맛이 아주 특별할꺼야.” 마이클은 물담배 맛이 식욕을 돗구는지 접시에 담긴 마른 견과류를 한움큼 집어 입속에 털어 넣었다. “나야 언제나 특별한 일 없이 지내지. 요즘 공방이 많이 바뻐졌어. 같이 동업하는 친구가 몇주동안 자리를 비운틈에 좀처럼 쉴틈이 없었다구. 시에서 또 다시 부탁해온 가구들을 완성시키느라 밤을 세울때가 많아. 그래서 요즘 공방을 도울 친구를 물색 중이야.” 모하마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파이프를 통해 다시 연기를 집어 삼킨다.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얼마 전에 내가 물건을 종종 팔아 넘기는 백작 집을 찾은 적이 있었거든. 그런데 거기에 한 눈에 들어오는 섬세한 가구들이 현관 앞에 수북히 쌓여 있더군. 누군가로 부터 배달이 온 모양이야. 자네 솜씨랑 상당히 비슷해서 한동안 그것들을 지켜 보았다네. 혹시 자네 주세피 돈 지오바니 백작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마이클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 금시초문일쎄. 어쩌면 나와 함께 작업하는 친구가 자네가 말한 백작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와 동업하는 친구가 워낙에 조용한 성격이라, 일 외 개인적인 사정은 잘 설명하려 들지를 않아. 그렇다고 내가 그의 사생활을 그리 궁금해 하지도 않고.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파이프를 마이클에게 건넨 모하마드가 입을 열었다. “그 가구를 만든 친구가 목재 하나를 부탁했는데 말이야. 그게 여간 구하기 힘든게 아니여서 말이지. 지오바니 백작이 사례는 두둑히 하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정작 그것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마이클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떤 목재를 말하는거지? 왠만한 목재라면 여기서도 구할 수 있을텐데 말이야.” “포르투칼 탐험대가 유럽으로 들여왔다는 퍼남부코 나무가 바로 그것이지. 배를 타고 몇달이나 가면 브라질이라는 곳에 도달하게 되나봐. 거기 해변가에서 자라나는 나무라고 하니 구하기가 만만치 않을꺼야.”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마이클이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모하마드에게 말했다. “다음번에 백작을 만난다면 그의 이름을 물어봐 주게나. 그리고 구할 수 있다면 넉넉히 구해 내게도 좀 가져다 줄 수 있겠나?” 마이클의 얼굴엔 흥미롭다는 표정이 여려있었다. 담배 파이프를 받아든 모하마드가 곧바로 대답해 왔다. “그럴건 없다네. 이미 그 친구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자네 역시 그 목재에 관심이 있다니 가능하면 넉넉히 구해 보겠네. 그 사람 이름이 바이런 남작이라고 하더군. 그 친구가 부탁한 약품들을 이번에 어렵게 영국상인을 통해 전해받아 백작에게 건네 주었지. 천연 도료, 희석제, 조제, 안료 등 모두 가구에 사용하는 약품들이긴 한데, 그 중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 몇개 섞여 있었네. 하지만 그것들 중 재미있는 것이 하나 들어 있었지. 황소의 발굽과 뿔을 커다란 증류기에 넣어 만들어내는 염화 암모늄이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걸 ‘뿔의 정령’이라고 부른단 말이야. 자네가 증류기를 본 적이 있을련진 모르겠지만 증류기라는 것은 투명한 유리나 커다란 철통에 재료를 넣은 후 오랜 시간동안 원료들을 삶아 진한 원액으로 만드는 기구지. 나야 백작이 적어준 물품들을 상인에게 보여준 것이 다라면 다니까 말일쎄. 처음 물품목록을 읽어보던 상인도 의아해 하는 얼굴을 짓더군. 엉뚱하게도 서로와 걸맞지 않는 것들이 목록에 적혀있다는 표정이였어. 피식 웃던 그가 몇일만 자기에게 시간을 주라고 했지. 그 도시는 해변가와 가까워서 한 며칠을 그곳에 묶으면서 그 상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네. 뿔의 정령이란 이야기도 그가 알려준 것일쎄. 그리고 해변이 보이는 낭떠러지 위에서 물담배를 피우며 쉬는 일은 낭만 그 자체였네. 눈 앞에 펼쳐진 바다는 세루리안(cerulean) 색상이였어. 낭떠러지 위에는 흰 구름덩어들이 둥실거리고 있었으니 세루리안블루가 정말 맞는 얘기야. 라틴어로 세룰리안은 ‘하늘’이잖나. 그리하나 저리하나 지오바니라는 노백작이라는 인물은 예사롭지 않은 인간임이 분명해. 상대에게 허술한 것처럼 굴며 빈틈을 보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보면 그의 머리속에서 무슨 생각이 만들어지고 있는건지 전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가끔씩 시간이 나서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다보면 어느세 그가 몇수 앞을 내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깜짝 놀라 버리지. 비상한 노인이야.” (계속)

 


 

 

 

 

◈ 참고
• 지휘법의 기초 - 삼호출판사
• 음악과 커피를 사랑하는 나 - 블로그
• 스트라디바리 블로그 악기 컬렉터의 세계 – 블로그
• 남양주시 교향악단 홈페이지 - 바이올린 제작 과정
• 클라식사전, 위키사전, 야후영한사전, 야후국어사전, 스포츠사전, 네이버 사전
• 목제박물관 자료
• 하나악기 바이올린 제작 홈페이지
• Violinist: Angele Dubeau, Hilary Hahn
• 어여쁜 필리스를 보았네 - 존 파머
• 바울성서연구
• 음악: Classical 963 FM

• 음악: Gabriel's Oboe, Virtuose, Higdon - Tchaikovsky - Violin Concertos, Bach Concertos - BWV 1043
• 師事: Jo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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